빈 자리



한 남성이 등장한다.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걷는다. 아이는 발레 신발을 들고 있고, 남성은 통화를 하고 있다. 남성이 통화를 마치자 아이는 남성에게 춤을 추자고 한다. 남성은 아이를 따라 춤을 춘다. 오늘은 아이가 발레 공연을 하는 날이다. 남성은 미팅 시간을 미루고, 아이의 발레 공연을 보기로 한다. 한 여성이 육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는 여성을 발견하자마자 그녀에게 달려가 아빠가 오늘 공연을 같이 간다고 전한다. 부부는 입맞춤을 한다. 남성이 잠시 아이와 여성으로부터 떨어져서 전화를 받는다. 그때 검정 복장에 검정 복면을 쓴 누군가가 손에 칼을 든 채 나타난다. 남성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살인자가 여성과 아이 앞에 서 있을 때이다. 살인자는 아이를 찌른다. 아이는 육교 아래로 떨어진다. 남성은 울부짖으며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아내는 아이를 찾다가 돌연 육교 밑으로 떨어진다.  

The After. 영화가 시작된다. 남성은 택시를 몬다. 얇은 막을 쓴 수신자. 그는 승객들의 탑승과 하차 사이에 오가는 말들을 고스란히 듣는다.  

얇은 막이 푹 찔린다. 그는 쓰러진다. 폭발. 솟아남. 종축과 횡축으로 일어나는 상승과 하강. 예상치 못한 찔림, 시간이멈춘다. 아주 잠시.     

다시 시간이 흐르고. 미묘하게 무덤덤한 몸을 입는다. 일어선다 걷는다 바퀴를 움직인다.



먼 발치에서 애도하는 마음을 떠올리며 작은 몸짓을 비튼다. 그 자리에는 '왜?’라는 질문이 남는다. 물음표를 부여잡는다. 무엇이 발생할까? 고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 흔들거리지만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는 상태에서.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행위자는 자기 몸의 움직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안다. 상실을 상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얼만큼 지속할 수 있을까?  

'당신/너'. 빈 자리. 상실된 자리. 너는 사라졌다. 나로부터, 나에게서. 나는 네가 남긴 흔적/흉터/상흔/자국을 어루만지며 너를 가늠한다. 너를 그리며 침잠한다. 어느덧 십여 년의 시간이 흘러간다. 너에 대한 기억이 참으로 선명했다. 지금 너의 자리는 짙푸르고 노랗게 흩날린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저녁이 되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연속의 연속. 불연속의 연속. 발생한 파형은 소멸하지 않는다. 무한수열의 끝나지 않는 점들의 증폭. 너에 대한 기억. 발생했던 상실의 순간이 어딘가에 닿아 반사되고 굴절되어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파장은 나를 통과한다.  

나는 또 한 번 너를 상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