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몸을 일으킨다. 미뤄 왔던 길을 나선다. 안산으로 향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김혜순 시인의 글을 읽는다. 시인은 귀로 쓰는 시에 관해 이야기한다. 말이 그치고 귀에 들어오는 것들을 구축해 쓰는 ‘귓말’에 관하여.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빠른 질주 속에서 발생하는 철길의 마찰음이 귀를 채운다. 진동 발생.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귀의 진동으로부터 무엇을 받아 적을 수 있을까?
강수 확률이 적잖이 높은 하루다. 비가 내리기 전에 단원고4.16기억교실에 도착했다. 1층 로비의 안내 공간을 지나 2층으로 향했다. 공간은 붉은 벽돌과 누런 빛을 띈 나무 격자 틀이 교실 쪽 벽면을 채우고, 창문과 창문 사이 벽에는 피카소, 뭉크, 김홍도의 그림들이 자리하며 교실 복도를 재현하고 있다. 교실에 들어선다. 애도를 위한 기념비가 곳곳에 놓여 있다. 희생자들의 자리마다 이름이 새겨진 패와 사진, 방명록과 조화가 놓여 있다. 직접 뜬 뜨개 방석과 등받이 덮개, 고유한 기념물들이 놓인 자리도 있다. 애도를 위한 교실 공간이 전체적인 풍경으로 들어온다. 방문자들이 남기고 간 그리움과 애도에 관한 글들이 곳곳에 적혀 있다. 어떤 자리에는 1103쪽에 달하는 세월호 진상규명에 관한 책이 놓여 있다. 마지막 페이지는 물기에 젖어 파란 잉크가 번져 있다. 어떤 마음으로 1103쪽의 글을 눌러 담았을 지, 다 써내고서 희생자의 책상 위에 놓아두는 마음은 어땠을 지. 물을 수 없는 물음들을 속에 묻는다. 교무실에 들어선다. 교무실에 놓인 교무일지에 적힌 ‘세월호’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지금의 ‘세월호’이기 전 기표로서 세월호. 2층을 지나 3층으로 향한다. 아랫층과 비슷한 형태의 복도와 교실 공간 속에 각 희생자들의 자리가 자리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그들을 애도하기 위한 공간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흩어진다.
교실이라는 공간이 애도를 위한 공적 장소가 되었다. 온전히 애도하는 마음으로 젖어 들기에는 체기가 스며 어딘가 한 편을 막아 세운다. 무엇이 ‘온전한’ 애도를 가능하지 못하게 한 걸까? 적절히 멸균된 장소 속에서는 그에 맞는 정돈되고 다듬어진 애도처럼 보이는 행위만이 가능하다. 공기청정기와 백색등의 발열 소리. 애도를 위한 장소의 마땅한 형태에 대해 떠올린다.
1982년 마야 린(Maya Ying Lin)은 미국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기념비(Vietnam Veteran’s Memorial)>(1982)를 설계했다. 125도로 벌어진 V형태로 벌어진 검은색 벽면은 V의 가운데 점을 기준으로 완만한 경사면으로 이룬다.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는 검은 돌벽은 적힌 이름과 함께 전경의 풍경을 담는다. 이름이 새겨진 거울과 같다. 하강하며 그 이름과 전경과 자신의 모습이 겹친 면의 곁을 감각하며 침잠한다. 그리고 다시 완만하게 상승한다. 하강과 상승의 걸음에서 어떤 것들이 몸에 남게 될까.
사운드 녹음을 하고자 녹음기를 챙겨왔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바람도 불어 소위 녹음하기 좋지 않는 날씨라고 하는데, 문득 이 시간을 잘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런 날의 기록은 어떻게 담아내는 것이 맞는가를 고민하기에는 내가 지닌 장비가 적잖이 빈약하다. 녹음기와 소형 삼각대, 수음 확인용 이어폰이 전부이다.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담기에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잃어버릴 길을 가늠하며 거닐 자리를 그려본다.
길을 나서자마자 가늠했던 길자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발을 딛는다. 입고 나온 얇은 백옥색 바지는 금세 파도빛으로 물들고 발에는 물기가 축축하게 스며 든다. 빗소리가 주변에 가득하다. 빗물이 떨어져 마주치는 바닥마다 저마다 지닌 고유한 소리로 말을 주고받는다. 주르륵, 툭, 둑. 뚝. 물줄기를 추월하는 바퀴들의 소리가 사이사이에 박힌다. 사거리를 건너 어느 공원 속에서 물소리를 듣고, 한 주택가 뒷편에 놓인 철제함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었다. 단원고등학교 앞에 이른다. 맞은편 주택가를 따라 길을 걷는다. 귀 담아 들으며 걷는다. 나의 듣기는 무엇을 기록하고 기억하게 할까? 통증을 돌아보는 행위로서의 걷기와 듣기를 행한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행할 것인가에 관해 귀를 통해 묻고, 귀를 통해 듣는다. 몸이 떨린다. 냉기와 함께 질문에 대한 응답의 진동이 깃든다.
경기도미술관에서 다다랐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추념전 ⟪우리가, 바다 Memory, Share, Wish⟫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 공간 초입에는 팽목항의 풍속을 bpm으로 변환시킨 북소리가 울린다. 그와 함께 자리한 푸른 드로잉 연작들로부터 내면의 기억을 돌아본다. 작가들의 교차하는 시선과 글담을 살핀다. 자신이 자리한 곳에서 시작하는 듣기와 관찰로부터 행해지는 작업들이 몸에 젖어든다. 기억하는 몸짓은 느릿한 동시에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안개가 걷히는 날이 올까? 안개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그린다.
잔상의 소립자들 … 영원히 다른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뻗어 나가는 소립자의 운동을 생각한다. 경계 없는 그것들의 유동을 생각한다. 거울처럼 펼쳐져 침몰을 생중계하던 텔레비전을 끄고 잠들지 못하던 밤의 창밖에 가득히 몰려온 안개를 생각한다. 안개처럼 방 안을 감싸는 잔상의 소립자들을 생각한다. 그 소립자 하나하나의 폭발을 생각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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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혜순,여성, 시하다(서울: 문학과지성사, 2018), 93.
나의 안팎으로 폭발했던 소립자들의 자취를 다시 그려볼 힘이 생겨난 걸까? 동굴에 들어차 있던 진물들이 빠지고 난 자리, “장소 없는” 장소를 내어 보일 틈이 생긴 걸까? 물기가 마른 자리 앞에 다시 선다. 많은 이들이 이미 이 자리에 서 있었구나.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나’의 죽음을 맞이하고, ‘침묵의 소리’를 노래하며 ‘나’와 ‘당/신’ 사이에 자리했다.
전시를 다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미술관을 빠져나와 공원길을 걷는다. 오래도록 비가 내리니 육지 위로 오리가 걸어 다닌다. 오리는 인기척에 놀란 듯 날개를 열고 바삐 비행한다. 아스팔트와 땅 사이로 떨어지는 빗소리의 차이를 느끼다가 몸의 온기가 꽤나 떨어졌음을 느끼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공원의 끝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연주하는 관악기 소리가 들린다. 비 오는 날 악기를 가지고 나와 협주를 이루는 이의 호흡에 잠시 시간을 맡긴다. 악기 소리가 잦아든다. 웅덩이 몇 개와 아스팔트 위로 솟은 무성한 풀들을 지나 지하철에 도착한다.